이 연구는 호적대장, 족보, 방목, 호구단자, 교지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화가로 잘 알려진 석재 서병오의 가계를 재구성한 것이다. 달성서씨 족보와 대구부 호적대장을 활용해 17세기 말에는 이 가계 남성들이 하급 향리나 보인 직역을, 여성들은 ‘조이[召史]’라는 상민 호칭을 사용했음을 확인하였다. 이 가계는 대구에서 1769년 편찬된 족보에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 낮은 위상을 지녔으나, 19세기 후반까지 직역 상승을 억제하고 감영의 향리직을 세습하며 경제력을 축적하였다. 오랜 기간 공생이라는 향리직을 고집하던 이 가계는 고종대 과거제 운영의 변화와 합격자 증가 경향에 편승하여 호적에서는 물론, 실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. 특히 서병오에게는 유학 직역을 가지도록 하여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. 그 결과 서병오는 1891년 사마시 방목에 이름을 올리고 지방관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근대 서화가이자 민족활동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. 이 사례는 호적 내 직역의 변화를 통해 신분의 중요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보여주며, 고종대 과거제 운영의 변화가 상승 기회를 확대하여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작동하였음을 시사한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