이 글에서는 와 관련 문헌들의 상한 연대를 검토하고, 두 작품이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가악 문화, 그리고 시가 작품들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과정을 살펴본다. 와 및 그 배경설화를 실은 가장 오래된 문헌은 17세기 전반 심광세가 지은 해동악부 이며, 믿을 만한 의 수용 기록 또한 16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. 또 의 국문 형태는 의 가사로 문헌에 처음 나타나며, 악곡이 성립된 시점 또한 16세기 중반 무렵이다. 작자 기록 없이 最古의 가사로 전하는 는 악곡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형성된 작품으로 짐작되며, 선초 악장인 및 고려가요 등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것으로 파악된다. 역시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16세기 중반 작품인 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며, 해동악부 소재 이본의 ‘성황당’ 관련 어구는 동시기 있었던 개성 신당 방화 사건과 연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.
<br>이처럼 와 의 형성 시점은 그것의 수용기록이나 영향을 받은 작품들, 그리고 특정 표현에 관련한 역사적 맥락 등을 종합해 볼 때, 대체로 16세기 중후반으로집중된다. 그런데 이때는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이후 그를 기리는 세 군데의 사액서원이건립되어 정몽주의 숭배과정이 완성된 시점이기도 하다. 이러한 시기적 일치상은 와 이야기가 선죽교 전설과 마찬가지로, 정점에 오른 정몽주의 숭배화 작업을 대중적으로 더욱 확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산물임을 시사한다.